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삿초 동맹 (문단 편집) == 삿초 동맹의 성립 == 게이오 원년(1865) 봄,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의 주선으로 두 번의 회담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에서 사이고와 카츠라 코고로 간의 회담이 성사되기 직전,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배를 탄 사이고 다카모리가 갑자기 교토로 돌아가는 행동을 저질러 카츠라의 분노를 샀다. 삿초 동맹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으나 사카모토 료마는 기지를 발휘하여 사쓰마의 명의로 조슈를 위해 군함과 신형 소총을 구매[* 상기한 바와 같이 막부의 무역 통제가 있었는데, 사쓰마는 조슈 정벌을 위한 무기 구매라고 애둘러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슈는 사쓰마를 위해 쌀을 전달하는 것으로 서로의 쌓인 앙금을 풀기 위한 거래를 제안한다. 료마 일행과 [[타카스기 신사쿠]], 오다무라 이노스케[* 대하드라마 꽃 타오르다의 주조연. [[오오사와 타카오]]가 배역을 맡았는데, 주인공의 형부이며 후일 두번째 남편이라 별거 아닌 이 인물이 비중을 받았다.]의 설득으로 카츠라 코고로는 거래 및 회담 제안에 승낙한다. 이 거래로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한 양 번은 1866년 1월 초, 사쓰마 번의 가로 [[코마츠 타테와키]]의 저택에서 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코마츠 타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카츠라 히사타케, 요시이 토모자네, 시마즈 이세, 나라하라 시게루(이상 사쓰마)과 카츠라 코고로(이상 조슈)가 참석했다. 게이오 2년(1866) 1월 20일, 료마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저택에 들렸으나 양쪽 모두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특히 카츠라 코고로는 단신으로 사쓰마 측에 찾아간 것까지는 참고 넘어갈 수 있지만, 막부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사쓰마에게 숙이는 것 같아 수치심이 들었다. 그러자 료마는 사쓰마 측에게 달려가 먼저 조슈에게 손을 내밀기를 청했고, 마침내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삿초 동맹이 체결 되었다. 이상 회담의 내용은 철저하게 밀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기록이나 공식 문서도 없다.''' 다만 이 밀약을 카츠라 코고로가 6 개조로 정리하고 사카모토 료마가 보증인으로서 빨간 붓글씨로 서약한 서신이 남겨져 오늘날까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조금씩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마치다 아키히로 (2019)의 연구[* 해당 연구에서 인용된 사료는 키도 타카요시 서간문(수신인 사카모토 료마, 1866.01.23.), <킷카와 츠네마사 주선기>, <카츠라 히사타케 일기> 등이 거론된다.]는 삿쵸 동맹의 성립과 관련된 (위의 통설과는 다른) 타임라인을 제시한다. 케이오 2년 (1866년) 1월 18일, 사쓰마 번의 가로 [[코마츠 타테와키]]의 저택에서 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코마츠 타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카츠라 히사타케, 요시이 토모자네, 시마즈 이세, 나라하라 시게루(이상 사쓰마)과 카츠라 코고로(이상 쵸슈)가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6개조문의 아웃라인이 나온 상태였는데, 구두협약이었고, 문서화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한편 료마는 게이오 2년(1866) 1월 10일 토사번 낭인 이케 쿠라타, 신구 우마노스케, 쵸후번사 미요시 신죠와 더불어 시모노세키를 출발, 1월 18일 사츠마번 오사카번정[* 오사카 내의 사츠마번정으로 추정]에 들어가, 19일 후시미 테라다야에 머물고 있었다. 20일 밤 료마는 이케, 신구와 함께 교토로 잠입하고, 21일 코마츠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때까지도 6개조문은 성문화되지 않은 채, 구두 협약으로 붕 떠있는 상태였는데, 확실한 증빙서류를 원하는 쵸슈측 키도와는 달리 사츠마측은 밀약을 문서화하는 것에 상당한 저항감을 갖고 있어서 키도(=카츠라)도 (서류를 남기려는)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밀약의 내용을 문서화를 하려고 해도 사츠마 번사측에서는 증인을 구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사츠마측 번사들은 증인으로 서기 싫어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키도(=카츠라)가 코마츠 저택을 떠나기 직전에 마침 료마[* 사츠마측의 사자로써 쵸슈측에 파견된 전례가 있어서 양측에 면식이 있고, 쵸슈번 입장에서는 이미 반쯤 사츠마번사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키도 입장에서는 --굳이 싫다는 토박이 사츠마 번사 대신-- 내세우기도, 이용해먹기도 좋았다고 한다.]가 나타나자 21일 당일 그를 증인으로 세워서 6개조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 과정에서 코마츠 타테와키의 내용 컨펌이 있었다고 한다.], 23일 6개조 서약문(코마츠-키도 각서)을 성문화시킴으로서 오늘날 알려진 서신문(사카모토 료마 서명첨부)이 남겨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